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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의 고백

​주랑 

 

 

-

 

 

밥 먹을래?

 

 

갑작스러운 음성에 가방을 챙기던 은상이 뒤를 돌았다. 뒤에는 같이 수업을 듣는 아이가 웃으며 있었다. 은상은 그 아이의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마침 밥을 함께 먹던 준호가 오늘 학교를 나오지 않은 참이라 잘됐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은상은 조용히 가방을 챙겼고 이미 가방을 다 싼 아이는 여전히 웃으며 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상을 기다리면서도 교우관계가 넓은지 강의실을 나가는 아이마다 그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마치 동성친구처럼 오늘 데이트하러 가는데 화장 어떻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아이도 자연스레 조언을 해주었다.

 

 

“민희야, 근데 왜 점심 안 먹으러 가?”

 

“아, 저 친구랑 같이 먹으려고”

 

“은상이? 둘이 아는 사이였어?”

 

“음... 그냥~ 같이 밥 먹으면 좋잖아.”

 

 

민희라는 아이는 싱겁게 대화를 끝냈다. 은상은 그들의 대화에 관심도 없는지 조용히 자신의 가방을 다 챙기고는 민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민희는 싱긋 웃으며 다른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다른 친구들이 경제학과 존잘 둘이서 밥을 먹는 이례적인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거창할 건 없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메뉴를 정할 필요도 없이 학식을 먹으러 갔다. 경상대에서 학생식당까지 걸리는 시간은 걸어서 약 8분 정도, 이 8분 동안 둘 사이에는 처음 이야기해보는 사이같지 않은 편안함이 존재했다. 둘은 굳이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진 않았다. 민희는 은상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은상은 민희의 이름을 잘 몰랐다. 평소에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준호랑만 다니던 은상이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경제학과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소문난 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는 건 시선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물론 그 둘은 시선 따위 신경쓰지도 않았다.

 

 

“너 뭐 먹을래?”

 

“너는 뭐 먹게.”

 

“음... 난 제육볶음”

 

“난 돈가스”

 

 

평소에도 같이 먹는 것처럼 둘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은상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하려다 앞에 앉은 민희가 오늘 처음 이야기하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폰을 옆으로 슬며시 밀어놓았다. 민희는 그런 은상을 마치 말티즈를 연상시키는 눈동자를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부담을 살짝 느낀 은상은 민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은상은 민희의 이름을 잘 몰랐다.

 

 

“민이야, 할 말 있어?”

 

“엉?? 아니, 없는데”

 

“아, 그래?”

 

 

대화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민희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들었는지 민이라고 부른 은상을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물론 은상은 당연히 민이가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름이 강민이? 독특한 이름이네~’하고 생각한 건 비밀이다.) 고개를 돌린 은상은 당연히 거둬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선이 여전히 느껴지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큰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근데 왜 오늘 나한테 밥 먹자고 했어?”

 

“아~ 나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아, 진짜? 평소에는 누구랑 먹는데?”

 

“어... 그... 황윤성 형이라고, 공대 다니는 형 있어..!”

 

“아, 그래? 어쨌든 나도 오늘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차준호는 오늘 왜 안 왔대.”

 

“어, 너 준호 알아?”

 

“응, 중학교 때 친구였거든.”

 

“헉, 너 00중 나왔어?”

 

“응”

 

 

상상도 못한 정보에 놀란 은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준호 친구인데 왜 자기는 몰랐지? 여기서 살짝 말해보는 정보지만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은상은 준호를 좋아했다. 친구인데 당연히 좋아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연인의 마음으로 말이다. 물론 은상만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어쨌든 은상은 준호 얘기에 순간 눈이 반짝였다. 그 때 당연히 눈치 빠른 우리 민희 씨는 바로 은상이 준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아버렸다. 자신도 갑자기 너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은상은 한 두어번 헛기침을 내뱉고는 어... 음식 가져올게! 하고는 살짝 꼬인 스텝으로 일어나 다급하게 음식을 받으러 갔다.

 

 

-

 

 

그 날 이후 은상은 다시 준호랑 밥을 먹었고 민희는 이 시대의 인싸답게 하루는 윤성과, 하루는 정모와, 하루는 요한과...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과 밥을 먹었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은상과 민희의 사이랄까.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알고보니 옆집에 살아서) 서로 학교에 같이 가는 날도 늘어나고 은상이 수업이 늦게 마치는 날에는 민희가 은상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거나 밤에 둘이서 편의점을 가는 날도 잦았다. 물론 이 일들 중 80%는 민희의 친화력 덕분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은상이 자기 이름을 민이라고 알고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민희는 정말 극대노했었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고 어느새 시간은 흘러 11월이 되었다. 거의 시간표가 같은 금요일에는 늘 같이 집을 가는 민희와 은상은 오늘도 어김없이 추위에 떨며 집을 가고 있었다. 평소에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은상과 옆에서 사시나무마냥 떨고 있는 추위, 더위에 모두 약한 민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하하 호호 웃으면서 걸었다. 그러다가 은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민희야”

 

“엉?”

 

“너 알고 있지. 내가 준호 좋아하는 거”

 

“야~ 나도 준호 좋아해.”

 

“...그런 의미 아닌 거 알잖아.”

 

“...근데, 왜?”

 

“나, 고백하려고.”

 

“...어?”

 

 

은상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민희는 추위에 떨던 것도 멈추고 은상을 쳐다보았다. 추위에 코카 빨개진 채 은상을 쳐다보던 민희는 진지한 은상의 얼굴에 집에 가서 애기하자며 은상을 이끌었다. 은상은 알았다며 차가운 민희의 볼에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꺼내어 대주었다. 민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행동이나 하지 말라고.

 

 

-

 

 

“아까 갑자기 그래서 당황했지?”

 

“어? 어, 아, 아니? 너 차준호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고, 뭐...”

 

“사실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어서”

 

“...야, 당연하지~ 이 연애고수 형님이 도와준다!”

 

 

은상에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웃는 은상을 보면서 민희는 씁쓸해지는 기분을 없앨 수 없었다. 사실 민희는 은상이 언제 좋아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은상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은상에게 처음 말을 건 날에 민희는 그 말을 생각하고 건네기까지, 그 전날 저녁부터 말을 준비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팩도 하고 잤다. 수업시간 동안 집중도 못하고 온통 은상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결국 고른 말은 단순한 밥 먹을래? 이 한마디였고 그 짧은 시간동안 혹시나 은상이 거절하면 어쩌지 하고 속으로 눈알을 수억번을 굴렸다. 은상이 그러자고 대답했을 때 민희는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민희가 은상을 좋아하게 된 건 은상을 처음 만나자마자였다. 중학교를 같이 나온 준호와 같은 대학에 왔지만 민희는 이미 윤성과 더 친한 상태였고 준호도 은상과 다니는 바람에 같은 학과여도 거의 같이 다니지 않았다. 수업도 거의 겹치지 않아 마주칠 일도 없었던 둘이 시간표를 바꾼 후 마주쳤을 때 민희가 준호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 순간 준호의 옆에 서있던 은상을 만났다. 은상은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민희는 자신을 보고 싱긋 웃어보이는 은상의 얼굴에 준호의 인사 따위는 받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민희가 안 받은 거다. 준호 : ??)

 

 

“어...”

 

“민희야, 밥 먹으러 가야지.”

 

“...아, ㄱ,그래야지... 준호야, 밥 맛있게 먹어라...~”

 

“...나 밥 먹었다니까...?”

 

 

넋을 놓고 있던 민희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윤성이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희는 윤성 쪽으로 뛰어가면서 준호에게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어이가 없는 준호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은상에게 수업 들으러 가자며 손짓을 했다. 은상은 준호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며 그러자고 했다. 은상의 머릿속에 떠오른 민희의 이미지는 딱 그거였다. 준호 친구.

 

 

-

 

 

그러고 난 후 이상하리만큼 민희와 준호는 마주치지 않았다. 분명 수업은 같았는데 왜 이렇게 보이지 않는건지, 민희는 큰 눈을 뜨고 열심히 준호를, 정확히는 은상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애네 일부러 나 피하나? 내가 그렇게 욕망덩어리 눈빛으로 그 친구를 바라봤나? 할 정도로 은상과 준호는 민희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 둘은 착실하게 수업에 나왔지만 민희가 그저 못 찾을 뿐이었다. 물론 은상은 이미 민희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후였다.

 

그러다 민희가 은상을 발견한 건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준호와 함께였으며 머리는 빨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은상의 빨간 머리를 발견한 순간 민희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애가 왜 이래? 하면서 심장 부근을 퍽퍽 쳐봐도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얼굴까지 빨개지기만 할뿐이었다. 준호가 민희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손을 흔들 용기는 없었는지 은상과 함께 다가왔다. 그 순간 민희의 마음속에서는 오지 말아라하는 마음과 은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부딪히는 모순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민희~ 밥 먹었어?”

 

“어, 어? 어... 방금 정모 형이랑 먹고 오는 길...”

 

“정모 형은?”

 

“아, 형 애인이 데리러 왔더라.”

 

“민규 형?”

 

“엉, 그 형도 대단해. 매일 데리러 오는 거 보면”

 

“그러게, 아 은상아, 너도 인사해. 저번에 인사한 적 있지. 강ㅁ,”

 

“야, 야...! 그 미안한데,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나 먼저 가본다!”

 

 

얼이 빠진 준호와 은상을 두고 도서관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민희는 도서관에서 나오다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윤성도 눈치채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은상... 은상... / 어, 민희야! 왜 이렇게 뛰어왔어... 자판기에서 물을 뽑아 민희에게 건넨 윤성이 민희가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자 귀를 기울인 윤성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은상이라는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어? 은상이? 하고 얘기했다. 그러자 민희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형 걔 알아? 하고 물었다.

 

 

“이은상 말하는 거 아니야? 차준호 친구”

 

“ㅇ,어 맞아...! 형이 걜 어떻게 알아?”

 

“뭐, 준호 친구니까 인사 정도 하는 사인데...”

 

“형 어떻게 나한테 얘기 안 할 수가 있어?”

 

“니가 언제 물어봤냐...”

 

“뭐?!”

 

“아니, 은상이는 근데 왜”

 

 

아무것도 아니야... 뒷말을 삼킨 민희는 윤성이 준 음료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윤성은 그런 민희를 물끄러미 처다보면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민희를 매우 잘 아는 윤성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얘 백퍼 이은상 좋아하네. 윤성은 조용히 한숨을 쉴 뿐이었다.

 

 

-

 

 

은상의 부탁은 간단했다. 그저 준호가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달라는 것이었다. 민희는 벌써부터 불안했다. 아 나 그런 거 진짜 못하는데... 그렇다고 은상이 부탁을 안 들어줄 수는 없고... 어떻게 이 강의를 듣는 내내 집중 한 반 한적이 없는 민희는 수업을 끝내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준호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로 (우린 알지만) 빠졌는지 모를 은상에 홀로 쓸쓸하게 가방을 챙기던 준호는 민희를 보고 밝게 웃으며 어? 강민희~ 하며 가방을 맸다. 민희는 누가 봐도 어색하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

 

 

“ㅇ,어~ 차준호, 오랜만이다^^ 근데 그 이...은상은?”

 

“모르겠다.. 오늘 일이 있다고 못 온다고 하더라구.”

 

“허,헉! 혹시 ㅇ,아픈 거 아니냐 ..~?”

 

“아, 그런가 ...? 이상하게 목소리가 힘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구...”

 

“야,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우리가 병문안 가자 ...~!”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우리의 눈새 준호는 그럴까? 하면서 금세 따라나섰다. 내심 안 된다고 말해주길 바랬던 민희는 씁쓸함을 다시면서 준호 어깨에 팔을 둘렀다. 준호가 은상의 집이 어딘지 모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준호가 누구냐. 은상의 짝남이자 은상의 고등학교 친구 아닌가. 준호는 자연스럽게 은상의 집으로 함께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준호가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민희의 조그만 안심이었다. 자기가 아는 그 비밀번호가 사실은 준호생일인 것도 모르고 말이다.

 

 

‘삐빅-‘

 

“은상ㅇ,”

 

 

은상의 집문이 열리고 준호가 은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로 들어서는 순간 민희는 집안에 보이는 광경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장난처럼 아픈 거 아니냐고 했던 그 말이 실제로 일어난 마냥 은상이 끙끙 앓으며 거실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이었다. 놀란 민희는 준호를 제치고 바로 쓰러져있는 은상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은상의 몸을 들었다. 자신보다 체격이 있는 은상을 드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지만 옆에서 놀란 채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준호는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민희는 숨을 헐떡이며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냅다 뛰었다.

 

 

-

 

 

“하... 씨발...”

 

 

한바탕 땀을 흘린 민희는 은상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준호는 여자 친구가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다고 갔다. 알고 보니 오늘 은상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할 예정이라더라. 은상아, 힘내라.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도 내심 나이스를 외치는 민희였다. 은상의 병명은 스트레스성 위염이랜다. 얼마나 고백준비를 열심히 했으면 스트레스로 쓰러지기까지 하냐. 민희는 한심하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상은 곧 눈을 떴다. 은상이 눈을 뜨자마자 민희는 호들갑을 떨며 간호사 누나를 불렀다. 부끄러움은 오로지 은상 몫이었다.

 

 

“누나, 누나!! 은상이 눈 떴어요!!”

 

“원래 금방 눈 떠요^^~ 그리고 병원 내에서는 조용히 해주세요^^”

 

“넹...”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진 않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카운터에 가서 약 처방받고 집에 가도 돼요^^”

 

“네, 감사합니다.”

 

“누나 !! 은상이 더 입원 안 해도 돼요?? 혹시나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

 

 

계속해서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민희를 뒤로 하고 은상은 병원비를 계산하려고 카운터로 갔다. 그러자 카운터에 서있는 간호사가 민희를 가리키며 이미 저 분이 계산하셨어요.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은상은 여전히 철없게 간호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민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

 

 

“야...그 고백...은”

 

“아... 맞다...”

 

“야, 야 근데 내가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응?“

 

“준호... 여자 친구 있다더라...”

 

“...”

 

“아니, 진짜 나도 몰랐어. 그, 준호가 오늘 니한테 말하려고 했다는데, 그게 지금 준호 여자 친구가 일이, 아니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자신의 잘못도 아니면서 계속해서 변명을 하는 민희가 왜인지 귀여워 보이는 바람에 웃음을 터뜨린 은상은 알겠다고 말하며 민희를 진정시켰다. 자신보다 키도 크면서 계속해서 눈치를 보는 민희가 마치 거대한 말티즈 같다는 생각을 한 은상은 계속해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준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충격에 빠져야 할텐데 생각보다, 아니 진짜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알 리가 없는 우리의 민희는 옆에서 계속해서 은상의 눈치를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민희의 구세주(?)인 윤성의 실루엣이 보이자 민희는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윤성을 불렀다.

 

 

“윤성이 형!”

 

“어, 안녕하세요.”

 

“오~ 은상이 너 쓰러졌다며, 괜찮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강민희 너 고백 도와주러 간다ㅁ.”

 

“아, 아 이 형이 참...~ 무슨 소리야... 은상이 집 놀러간다고 했잖아... 하..하 ..”

 

 

민희가 황급히 윤성의 입을 막았지만 귀가 있는 한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은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준호의 여자 친구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민희와 더 많은 말을 하는 윤성이 왜인지 거슬렸다. 왜 저 형한테 그런 것까지 다 말해? 눈치를 보던 민희는 어색하게 웃어보였고 눈치 빠른 민희보다 더 눈치 빠른 윤성은 민희의 손을 떼고 웃었다. 민희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잊고 있던 윤성의 고딩 시절 별명. 바로 빙썅, 빙그레 썅놈이라는 뜻이었다. 윤성은 민희가 막을 틈도 없이 은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뭐, 그래. 인생 차일 수도 있는거지... 낙심하지 말어~”

 

‘하, 시발 저 형이 뭐하는 거야.’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은상은 윤성과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자신의 어깨에 놓인 손을 괜히 꽉 쥐어 떼어냈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에 놀란 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윤성은 조금 당황했지만 여기서 티를 내면 개쪽이다 싶어서 당황하지 않은 척 손을 거두었다. 은상은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왜인지 모를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리가 없는 민희는 입을 벌린 채 둘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은상을 데려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하... 은상이가 지금 정신이 없으니까 집에 가볼ㄱ,”

 

“뭐, 아니면 그새 좋아하는 사람이 바뀐건가?”

 

“혀, 형... 왜 그ㄹ.”

 

“그럴지도 모르죠.”

 

 

은상의 폭탄발언에 놀라지 않은 건 윤성뿐이었다.

 

 

-

 

 

그 다음 날, 민희는 혼자 등교했다. 그 이유인 즉슨 자신에게 온 줄 알았던 윤성이 은상의 집 앞에서 은상을 기다렸다가 은상을 데리고 먼저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데에는 눈치가 없는 민희는 둘이 그새 친해졌나? 아니면 또 싸우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혼자 등교하는 참이었다. 11월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팔을 관통하는 듯한 추위에 괜히 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강의실에 도착하자 분명 준호 옆에 있어야할 은상은 온데간데없고 준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사실 처음 보는 여자는 아니고 오고가다가 인사 몇 번 한건 기억나는데 누군지는 정확히 몰랐다. 은상을 찾느라 정신없는 민희는 준호의 인사는 보지도 못한 채 두리번거리다가 들어오는 교수님에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았다.

 

 

‘강민희‘

 

“네...”

 

‘강학두’

 

‘네‘

 

...

 

‘이은상‘

 

“...”

 

‘은상학생? 안 왔나요?’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을 열며 들어온 은상은 숨을 가쁘게 쉬며 민희의 옆에 앉았다. 놀라기도 잠시 민희는 은상에게 조용히 윤성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나 은상은 대답은 안 해주고 싱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은상은 민희를 대놓고 피하기 시작했다.

 

 

-

 

 

“형!”

 

“어이쿠, 민희야,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형, 그때 도대체 이은상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무슨 말이야?”

 

“이은상이 형이랑 얘기하고 온 다음 날부터 나를 피하잖아!”

 

“뭐, 바쁜 일이 있나보지^^”

 

“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피해??”

 

“아니면 은상이도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나갔을 수도~?”

 

“...아, 몰라. 형 완전 짜증나...”

 

 

윤성에게 앙탈을 부리던 민희는 괜스레 자신의 앞에 보이던 캔을 발로 찼다. 그러다가 저기 멀리서 보이는 강렬한 빨강머리에 이번에는 안 놓친다는 신념 하나로 윤성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은상 쪽을 향해 달려갔다. 윤성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 날 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

 

 

“형, 어쩐 일이세요?”

 

“뭐, 친한 동생이니까^^?”

 

“...하실 말씀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니가 민희보다 눈치가 빠르구나^^”

 

“...”

 

“뭐, 대충 니가 준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근데 사실 난 그거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냥 니가 준호랑 너무 오래 같이 있어서 그랬겠지. 그건 너도 어제 깨달았지 않나?”

 

“... 뭐, 대충은요. 근데 그게 왜요?”

 

“또 눈치 없는 척 하기는~”

 

“...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그냥, 민희는 나쁜 남자보다는 착한 형이 어울리지 않겠냐 하는거지~”

 

“... 가볼게요. 강의 시간 지났어요.”

 

 

누가 봐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자리를 뜨는 은상을 바라보던 윤성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뿐이었다.

 

 

-

 

 

“야, 이은상!!”

 

“...헉,”

 

“너 거기 안 서나?!!”

 

“미, 민희야... 우선 진정하고...”

 

“진정?! 니라면 지금 진정하겠나!”

 

 

흥분에 사투리까지 튀어나온 민희가 긴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은상에게 뛰어왔다. 본능적으로 피하던 은상은 더 이상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민희의 앞에 섰다. 씩씩대며 다가온 민희는 막상 은상의 앞에 서니 오랜만에 보는 잘생긴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귀가 빨개졌다.

 

은상은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민희를 좋아하는 게 맞나?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금방 바뀔 정도로 금사빠였나? 하는 생각을 하느라 며칠 동안 수업에 집중도 못했다. 그러나 은상이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바로 2일 전쯤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황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가다가 공대 앞쪽에서 서성이는 민희를 보았을 때, 정갈한 흑발과 스프라이트 셔츠를 보는 순간 발끝부터 달아오르는 듯한 열기에 아, 내가 진짜 강민희를 좋아하나? 하다가 공대 문을 열고 나오는 윤성이 아무렇지 않게 민희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보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느끼는 순간 자신이 민희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선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

 

 

“한 번 얘기해봐.”

 

“... 물줄까?”

 

“당연하지...가 아니라 말 돌리지 마.”

 

“우선 앉아봐...”

 

 

민희는 은상네 집의 바닥에 앉았고 은상은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물을 따르는 손도 덜덜 떨렸다. 은상은 민희에게 물을 건넸고 민희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 마시는 모습도 예뻐 보인다니, 이은상 니가 진짜로 돌았구나. 민희는 모를 생각을 이리저리 하던 은상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 사이의 정적을 견디지 못한 민희는 먼저 말을 꺼냈다.

 

 

“... 내가 뭐 했는데.”

 

“어?”

 

“차준호가 여자 친구 있는 게 내 잘못이야?”

 

“... 그,”

 

“나도, 어? 너 도와주려고... 흐,”

 

“미, 민희야...!”

 

 

말을 하다 보니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민희는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고 당황한 은상은 눈치를 보다가 민희의 머리를 껴안았다. 서운함에 울던 민희는 놀래서 울음을 멈췄고 은상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는 시게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놀래서 침조차도 삼키지 못한 채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울리는 은상의 핸드폰에 그제야 떨어진 둘은 어색함에 허허 웃어보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전화가 아닌 알람이었기에 중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었다.

 

 

“...”

 

“...”

 

“... 미, 미안...”

 

“ㅇ, 어? 아니... 내가 울어서...”

 

“... 사실 나 이제 준호 안 좋아해.”

 

“아, ㄱ, 그ㄹ, 어?”

 

“내가 너무 변덕쟁이 같아서 말 못 했어. 근데 사실 너가 준호 여자 친구 있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충격 받지도 않았어. 사실은 그 사실보다 윤성이 형이랑 니가 더 신경 쓰였어,”

 

“어...?”

 

 

‘이건 고백인가...?‘

 

 

“처음엔 당연히 생각도 안 했어. 근데 며칠 전부터 너가 그 형이랑 있으면 신경 쓰이고 나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준호한테는 이런 생각 안 들었는데 그냥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까 머리끝까지 열이 나더라.”

 

 

은상은 그 말을 하면서 얼이 빠진 민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살포시 겹치자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민희의 얼굴이 귀여웠다. 자신도 모르게 민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은상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친구에 대한 독점욕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저께 니가 공대 건물 앞에서 윤성이 형 기다리는데 그거 보면서 순간 짜증나더라. 너의 모든 순간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 이거, 고백이야?”

 

“아니면 뭐겠어?”

 

“... 진짜로?”

 

 

민희의 물음에 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의 얼굴엔 순식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 은상의 눈에 단박에 보였다. 그것도 너무 귀여워서 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민희의 속눈썹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민희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은상은 그런 민희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

 

“민희야, 나랑 연애할래?”

 

 

11월에 찾아온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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