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손야
"밥 먹을래?"
"응? 너랑?"
"응, 나랑."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채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서 은상이 말을 건넸다. 시끄럽다고 뭐라할 줄 알고 내심 쫄아있던 민희가 놀란 눈을 하고 은상을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굳은 채로 은상을 올려다보니 정확하게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민희는 가만히 앉아서 보던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친하지도 않고, 하루에 말 한마디 섞을까 말까한 사이인데 밥을 먹자고? 안될건 없지만.. 굳이 나랑?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은상은 민희가 알겠다고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꿋꿋하게 서있었다. 그래, 같이 먹자. 민희의 대답과 동시에 은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뭐 먹을래? 은상이 민희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딱히 생각이 없던 민희는 아무거나. 라고 대답해버렸다. 은상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돈가스 좋아하냐며 되물었다. 남자 둘이서 마주앉아 돈까스 먹고 있으면 퍽이나 좋겠다. 은상의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던 민희는 그냥 알겠다며 은상을 따라갔다.
은상을 따라간 돈가스 가게 안은 깔끔했다. 노란색의 은은한 조명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켰던 돈가스가 나오자 은상은 열심히 칼질을 하며 돈가스를 자르기 시작했다. 다 자르고 나서 민희 쪽으로 들이밀며 민희의 돈가스 접시를 자기 앞으로 옮겼다.
"뭐해? 그거 내껀데. 내가 자를게."
"아니야. 너 그거 먹어."
민희는 말 없이 돈가스를 포크로 찍어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돈가스 자르는 데에 부심있나.. 먹는 내내 은상은 민희를 챙겨주었다. 물을 떠다준다거나 휴지가 필요해보이면 바로 뽑아서 건넨다거나. 사소한 배려를 베풀었다. 그런 은상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송형준 말이 진짜였어? 마니또라서 이렇게까지 챙겨주는거야? 역시 반장이라서 그런가.. 밥 먹는 동안 은상을 예의주시하는 민희였다.
마니또
w. 손야
"야, 강민희. 네 마니또 누구냐? 보여줘봐."
"얜데, 나 얘랑 진짜 안 친한데."
형준이 민희를 향해 걸어오며 네 마니또는 누구냐며 물었다. 이내 민희가 뽑은 종이를 보고는 웃어댔다. 너 쟤랑 완전 어사잖아. 힘내라! 형준이 약오르게 민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모의 마니또를 알아내기 위해 자리를 떴다. 마니또 뜻이 비밀 친구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민희는 눌러접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바닥만 한 종이를 들고있었다. 이은상 종이에는 손글씨로 이은상이라는 세글자의 이름이 덩그러니 적혀있었다. 민희네 반의 반장이었다. 매번 전교1등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공부 잘하는 데다가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아이. 엄친아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런 이은상이 내 마니또로 뽑히다니. 반에서 쟤 뺴고 다 친한데... 은상이 있는 곳으로 민희의 눈이 따라갔다. 은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또 어색해지는 거 같았다. 모든 아이들과 두루두루 친한 은상과 몇마디 나눠본 적 없는 민희는 막막하기만 했다.
정모는 형준에게 민희의 마니또에 대해 들었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강민희 얼굴봐라. 넋이 반쯤 나간 채 서 있는 민희를 보며 정모는 형준이 자신에게 해준 말이 구라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이은상이 걸리다니. 그러게 평소에 내가 얘기 좀 나눠보라고 할 때 나누지 그랬냐. 정모는 민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민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야, 구정모. 이거 안 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어떻게 되긴, 방학식때 대청소하는거지. 그냥 청소할까? 미쳤냐, 우리 담임 청소 완전 빡세게 시키잖아. 먼지 하나라도 나오면 다시 쓸고 닦아야하는 거 몰라? 아 맞다.. 씨발. 민희의 머리가 골이 울리며 아파왔다. 민희의 얼굴이 먹구름 낀 것마냥 어두워졌다. 진짜 좆됐네. 누가 마니또 하자 그랬냐고.. 정모의 옆에 앉아 아이들과 신나게 떠들어대는 형준이 원망스러워졌다. 송형준, 네가 마니또 하자고만 안 했어도. 그 시간에 자고 있던 내가 바보지. 누굴 탓하겠냐.. 민희는 다시한번 자신의 처지가 좆됐음을 느꼈다.
*
"거기. 너,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어."
자습시간에 담임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민희가 주변에 앉은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쉴 틈없이 떠들어대던 민희와 형준의 입을 멈추게 한 건 은상의 따끔한 한마디였다. 그 순간, 교실은 정적이 흘렀다. 나? 나 시끄럽다고? 형준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은상에게 물었다. 이내 은상이 한숨을 푹 내쉬며 화를 눌러담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너 말이야. 지금 자습시간인데 조용히 해줘. 여기 너만 있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 쏘아대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민망해진 형준은 입을 다물었고,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반면에 민희는 자신이 더 많이 떠들어댔는데도 형준만 꾸중을 들은 거 같아 눈치가 보였다.
*
축구를 하고 돌아온 민희가 교실로 제일 먼저 들어왔다. 아, 뭐야. 에어컨 안 키고 나갔어? 애석하게도 에어컨의 전원이 꺼져있었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 시원할 줄 알았던 교실 안은 찜통이었다. 윗옷을 잡고 펄럭이며 선풍기 바람을 쐐고 있을 수 밖에. 민희의 자리에 초코우유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뭐지 이건. 여기 내 자린데, 누가 잘못 나둔건가? 초코우유를 집어드니 차가운 냉기가 민희의 손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치 방금 매점에서 사온 것 같았다. 자신이 먼저 들어온 줄 알았던 민희는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야!- 형준과 정모가 들어오며 민희를 놀래켰다.
"아, 뭐야. 재미없게."
"네 손에 그거 뭐냐. 매점은 또 언제 갔다왔어? 하여튼 겁나 빨라 강민희."
이거 내 책상 위에 있었다? 형준과 정모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응? 마니또가 주고 간 거 아니야? 와, 부럽다. 내 마니또는 뭐하냐.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은 형준이 민희를 부러워했다. 마니또? 아, 우리반 마니또 하고 있었지. 민희는 초코우유를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달콤한 초코맛이 입 안에서 감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빨리 오는건데. 마니또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아쉬웠다.
그 뒤로도 책상 서랍, 사물함, 책가방 곳곳에서 마니또가 준 선물이 나왔다. 이제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정모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했다. 야, 그 정도면 찐사랑 아니야? 어떤 마니또가 이렇게까지 챙겨줘. 한번을 들키지 않고, 선물공세를 하는게 대단하기까지 했다.
형준은 강민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대는 마니또의 정체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며 다짐했다. 정모는 헛수고 하지 말고, 공부하라며 형준을 타박했다. 역시나 헛수고였다. 투명인간이 아니고서야 나의 감시를 다 피해가다니. 보통놈이 아니군. 그래도 자신의 인생에서 포기란 없었다면서 그 마니또를 알아내겠다고 난리를 치고 다녔다. 하지만, 정말로 형준이 알아내고 말았다.
때는 방과후였다. 담임선생님과 진학상담을 기다리다 화장실을 잠시 갔다온 순간, 누군가가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어? 누구지. 오늘 상담은 강민희랑 나밖에 없는데. 교실 뒷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반장이 한 자리에서 서성이는게 보였다. 뭐하고 있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 주변을 살피더니 책상서랍 안에 넣었다. 은상은 황급히 교실 앞문으로 나갔다. 형준이 뒤이어 뽈뽈거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은상이 방금까지 서성였던 자리로 향했다. 책상서랍 안에는 젤리 봉투가 튀어나와있었다. 급하게 넣고 간 티가 났다. 와, 나도 젤리 좋아하는데. 내 마니또는 진짜 뭐하고 있냐. 부러워하던 와중에 누구의 자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서랍 안 교과서를 꺼냈다. 교과서 표지에 큼지막하게 써있는 이름 세글자가 눈에 띄었다. 강민희 어? 강민희라고? 형준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 자리의 주인은 바로 민희였다. 미친. 드디어 알아냈다.
*
"강민희! 내가 어제 뭐 봤는지 알아?"
"몰라. 네가 어제 본 걸 내가 어떻게 아냐?"
그니까, 뭐냐면. 너 어제 책상 서랍에 젤리 있었지? 젤리?... 어제 방과후, 상담이 끝나고 집에 가려 가방을 챙기는데 책상서랍에서 젤리봉지가 삐죽 튀어나와있던게 떠올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가 넣어놨어? 아니~ 누가 어제 넣어놓고 가는 거 봤거든. 형준이 힐끔 은상을 쳐다보았다. 민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데? 알려줘. 그저 형준의 어깨를 흔들며 재촉하기 바빴다. 그게 누구냐면... 형준이 민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엄마의 등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토요일 자습을 가게 된 민희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량한 선비처럼 여유롭게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말인데 무슨 자습이야.. 주말에는 집에서 쉬면서 게임하는게 최곤데. 혼잣말을 궁시렁대곤 했다. 익숙한 뒷통수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검정색 머리. 항상 검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는 반장 이은상이 틀림없었다. 아는 체해, 말아. 그래도 마니또니까 친한 척 해볼까. 내적갈등을 하던 민희는 결국 은상에게로 달려가 목에 팔을 걸어 어깨동무를 하였다. 안녕, 반장 너도 자습하러 가? 어, 안녕. 반갑게 아는 척하며 치대는 민희와 다르게 무미건조하다 못해 차가운 어투로 대답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민망해진 민희는 은상의 어깨의 올려져있던 자신의 팔을 자연스레 내렸다. 얘는 항상 나한테만 이러더라. 구정모나 송형준한테는 친절하더니만, 혹시 나 싫어하나? 나를 왜? 난 실수한 것도 없는데. 비밀친구한테 이래도 되냐고.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크흠. 민희가 헛기침을 하자 은상이 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 마치 헤어졌다 재회한 연인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민희는 서로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자, 은상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재고 있었지만 끝내 학교에 도착하게 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자습 중간에 피방으로 오라는 구정모의 연락을 받아 피방에서 게임을 땡기고 온 민희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와, 숨막혀 죽겠네. 교실 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숨소리를 냈다가는 금방이라도 눈총을 받을 것만 같았다. 동그랗고 예쁜 두상의 검은 머리가 또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은상이 집에 안 가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쟤 설마 밥도 안 먹고 저러고 있는거야? 미쳤네. 아니, 무슨 저 자리에 뿌리를 내렸나.. 대단하다 대단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민희의 시선을 느낀 은상이 슥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하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민희는 입을 앙 다물고 책상 위에 놓은 책을 냅다 펼쳤다. 민희는 매 수업시간마다 고개를 처박고 잠을 청했기에 필기라곤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서점에서 방금 사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했다. 들은게 있어야 자습을 하던 말던 하지.. 집에 언제 가지. 엎드려 은상의 뒷통수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토요일에 학교를 나와 자습을 하겠다던 민희가 1시간도 채 안돼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카톡창을 올렸다 내려 프로필 사진을 구경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반장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습에 출석체크를 하는 반장, 이은상이 강민희의 앞에 섰다. 아무말도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던 민희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 평소 은상이 학교에서 보이던 모습이랑은 다르게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 좀 시끄러웠어? 그냥 핸드폰 하고 있었는데.. 민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은상이 숨을 들이쉬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언제 집 가?"
"이, 이제 막 가려고.."
"잘됐다. 나도 지금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자."
대답도 안 했는데 자리로 다시 돌아가버렸다.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은상이 돌아가자 한껏 쫄아있던 몸을 다시 가다듬는 민희였다. 가만 보면 착한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무섭단 말이야.. 나만 그렇게 느끼나? 침을 꼴깍 삼켰다. 책을 가방에 대충 쑤셔넣고 은상과 학교를 나왔다. 너네 집은 어느 방향이야?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우리집.. 저 쪽이야. 손가락으로 아파트를 가리키며 은상의 물음에 답했다. 민희의 집은 학교에서 꽤 가까운 아파트였다. 아, 나도 그 쪽인데. 둘은 그 대화를 끝으로 말이 없었다. 걷는 동안 손과 손이 몇번 스치기만 할 뿐. 어느새 민희의 집에 다다랐다. 잘 들어가, 안녕. 너도 잘 들어가. 민희가 웃어보이며 돌아서려는데, 은상이 외쳤다. 저, 민희야! 다음주에도 같이 집 가자. 어..그래! 잘가. 민희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자 은상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민희가 서있던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집에 가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민희가 빗줄기 사이로 손을 뻗었다. 빗방울이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오늘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냥 비 맞으면서 가야하나. 민희는 메고 있던 가방을 머리 위로 들었다. 아마도 가방을 우산 삼아 가려던 모양이었다.
"강민희! 강민희 맞지?"
뒤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민희를 붙잡았다. 은상이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달려온다. 이제 집에 가나보네? 나랑 우산 같이 쓰고 가자. 우산을 펼치며 민희를 쳐다보았다. 둘이 쓰기엔 작았지만, 제법 튼튼해보이는 우산이었다. 그렇게 둘은 한 우산을 같이 나눠쓰고 갔다. 거세지는 비에 은상의 와이셔츠 어깨 부분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반면에 민희의 어깨는 방금 막 새것을 꺼내입었다고 해도 믿을만큼 멀쩡했다. 붙어서 걸으니 가까이서 본 적 없던 은상의 얼굴에 시선이 저절로 갔다. 쳐다보고 있자니 짝사랑하는 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왠지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민희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긴장이 되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둘은 빗줄기가 더 세지기 전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응. 잘 가. 내일 보자."
은상이 손을 흔들더니 빗속으로 사라졌다. 빗물에 젖어 축쳐진 채 은상의 몸에 달라붙은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저러고 가면 감기 걸릴텐데. 민희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
그 뒤로도 둘은 토요일 자습이 끝나고 집에 같이 가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
마니또 공개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자습 대신 수업시간을 빌려 마니또의 정체를 공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반 아이들은 하나둘씩 각자 자신이 뽑은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민희의 옆자리에 앉은 형준이 민희를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야, 네 마니또 백퍼 이은상이야. 확실한 거 맞아? 맞다니까? 형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순간, 강민희의 이름이 불렸다. 투닥거리던 형준과 민희의 시선이 이은상이 아닌 다른 아이에게로 쏠렸다. 어라? 쟤가 왜 네이름을 말하고 있냐. 내가 어떻게 알아. 형준이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분명히 봤는데.. 이은상이 확실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거야. 중복으로 뽑았나? 형준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를 않았다. 뒤이어 이은상이 일어나 자신이 뽑은 마니또의 이름을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강민희가 아니었다. 민희도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마니또여서 아니었다면, 그러면 왜 그렇게까지 잘해준거지? 뭐가 어떻게 되는거야. 그동안 내가 받아먹은 건 다 이은상이 준 거였어? 민희가 형준에게 물었다. 야.. 너 제대로 본 거 맞지. 응..분명 이은상이었다니까. 설마, 이은상이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형준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자 미간을 찡그렸다. 이은상이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
학교가 끝나고, 평소처럼 은상과 민희가 같이 하교를 했다. 은상은 여전히 온화하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해가 빨리 지고 하늘에 달이 떴다. 그것도 밝고 큰 보름달이 떴다.
"어.. 보름달 떴다."
"진짜네. 예쁘다."
"보름달 떴을 때 소원 빌면 이뤄진다던데."
"추석도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소원이 이뤄질지 누가 알아."
급기야 은상이 두손을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민희도 은상을 따라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다 빌고 눈을 뜬 은상이 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희의 뒷목이 뜨거워졌고, 괜히 뒷목을 쓸어내렸다.
둘은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민희는 은상의 눈치를 살폈다. 아.. 물어볼까? 괜히 물어봤다가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아까 학교에서부터 은상에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것을 결국 물어보게 되었다. 바로 마니또에 대해서.
"그.. 마니또 있잖아.."
"...."
"너 나 뽑은 거 아니었어?"
"민희야."
발을 맞춰걷던 은상의 걸음이 멈췄다. 어두워진 골목에서 환한 가로등 하나만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은상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내가 왜 너 챙겨줬을 거 같아?"
"글쎄.. 나야 모르지.. 난 네가 마니또 때문에 나 챙겨주는 줄 알았어."
"그렇구나."
"...."
"난 너 좋아해서 챙겨준 거였는데."
당황스럽다. 다짜고짜 나를 좋아한다니. 정말 몰랐는데, 이은상이 나를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민희가 시선을 바닥에 떨군다. 은상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민희였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은상이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어도 어느정도 호감이 있었다는 건. 은상이 민희와 말할 때면 항상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있는 것도,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는 민희와 우산을 같이 쓰고 가기 위해 기다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체 부정했지만. 하지만,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자신도 은상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은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고개를 들자 은상의 예쁜 눈과 마주쳤다. 은상의 소원을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 마냥 보름달과 똑 닮은, 가로등의 불빛이 은상의 눈동자에 비쳤다. 마치 눈 속에서 달이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에 뜬 달보다 밝았다. 왜 때문인지 말 안 해도 은상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곧 이뤄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