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속 순애보
뱡수
https://youtu.be/QXnTuUDCIJo
Telepopmusik - Close(Feat. Deborah Anderson)
"밥 먹을래?"
온 몸에 붉게 피칠갑을 한 채 집에 들어온 이은상은 요란한 모습과 달리 태연하다. 나를 껴안고 볼에 입술을 부빈 후 바로 끼니를 찾는 걸 보아하니 이 상태로 몇 시간을 내게로 오기 위해 뛴 것이 분명한데. 그래서 나는 떨어질 뻔한 심장을 숨기고 이은상과 같이 태연한 척을 하며 방금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한 밥그릇을 대놓고 보인 채로 말했다. 나도 아직 안 먹었어. 이은상이 웃으며 소매로 대충 피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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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공익 광고 문구를 안 본 사람이 있을까. 하루하루를 소중히 대하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심어주고 싶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구는 진짜로 멸망하기까지 채 한 달도 안 남았다. 왜 멸망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한 달 뒤에 멸망한단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믿고 있다. 어디서 나온 가설인진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광적으로 믿기 시작 하며 미쳐갔다.
웃기게도 그 광기에 나는 휩쓸리지도 대항하지도 않았다. 아직은 아무것도 와닿지 않는다. 지구 멸망이라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그치만 이은상은 아니었다. 그것에 확신이 있었다. 민희야, 지구가 멸망하면 널 닮은 자두를 먼저 심어버리자. 가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서울까지 바로 온거야?"
"너 보러오기로 한 날인데. 당연히 와야지."
이은상이 통조림 참치를 내 밥 위에 올려준다. 나 방금 참치 한 캔 다 비웠는데..... 라는 말을 이은상이 올려준 참치와 함께 목 뒤로 넘겨버렸다. 일 년 뒤 지구 멸망이라는 증거없는 가설이 퍼지면서 세상은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테러리스트들이 세상밖에 판을 쳐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를 일으켜 사람들이 죽어갔고 겁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숨어 언제 받을지 모르는 테러에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나는 후자이고, 이은상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이은상은 국가적으로 테러리스트를 말살시키는 정부군이다. 지구 멸망이 한 달밖에 안 남았지만 정부군은 항상 테러리스트들을 잡는 데 헌신했다. 세상엔 이은상같은 사람이 참 많은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바쁠텐데."
"안 바빠. 내일 아침에만 가면 돼."
"은상아,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너도 그냥 하고싶은 거 하고 살아."
이은상이 올리던 숟가락을 그대로 내려놓더니 느린 눈으로 날 빤히 본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고 있는데?"
"너는 테러리스트만 잡다가 죽고 싶어?"
"나 안 죽어."
"뭘 안 죽어 한 달 뒤면 너 말고 나까지 다 뒤지는데."
"민희야."
우리 안 죽어. 나긋하게 말하며 웃는 이은상이 어딘가 이상하다. 한 달 뒤 지구가 멸망한다고 제일 확신하는 놈이 우리 둘 다 안 죽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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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낮이 없어지고 있다. 그렇게 나와 밤을 보내고 아침에 사라진 이은상이 2주째 집에 찾아오지 않는다. 잘 터지지 않는 라디오로 대충 들었을 때 멸망이 가까워지면서 테러리스트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해 정부군이 전국을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 광기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언제 서울도 폐허가 될 지 몰랐다. 이은상이 바쁘겠구나.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건 무서워서 잘 때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에 들기 힘들었다. 자잘한 소음까지도 테러인듯 싶어 잠이 깨기 일쑤였다. 언제 이은상의 부고가 들려올지 몰라 손이 떨렸다. 이은상이 보고싶었다. 이은상 품에 안겨서 자면 불도 끄고 오래 잘 수 있을텐데. 밤이 길어지면서 멸망에 대해 아무생각이 없던 나조차도 종말을 점점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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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아직까지도 운영하고 있는 몇 개 남지않은 카페에서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윤진우를 만났다. 죽기 2주 전에 만나는 윤진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강민희, 너도 그대로야. 생각을 그대로 말로 내뱉었는지 윤진우가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린다.
"뭐 하고 지냈어?"
"막상 죽는다니까 별로 할 걸 못 찾겠더라. 가족이랑만 있었지."
"다같이 울었겠네."
"이상하게 눈물은 안 나. 나 아직 실감 안 나거든. 죽어봐야 알 거 같아."
윤진우는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하며 웃는다. 나는 포크를 휘둘러 앞에 잇는 치즈케이크를 아무렇게나 뭉개버렸다.
"그래도 진우 너는 같이 있을 가족 있어서 안 무섭겠다."
"그건 그렇지. 이은상은? 요즘도 바빠?"
"몰라, 어디서 뒤졌는지."
"그래도 마지막은 애인끼리 있어야 하지 않겠냐."
걔도 참 너무하다. 뭉개놓은 치즈케이크를 퍼먹으며 윤진우는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왔었는데. 정부군 사망명단을 확인해도 이은상은 없었다. 그럼 이은상은 분명히 살아있다는 건데. 아무리 바빠도 연락 한 통 없을리가 없는데.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그래도 라디오 들어보니까 바쁜 거 같아서."
"뭐, 서울만 멀쩡하지 다른 곳은 거의 폐허니까 그럴만도 하겠다."
"......."
"야, 걱정 마. 이은상은 죽을 애 아니야. 걘 명줄 진짜 길어보여."
어색한 표정으로 날 위로하던 윤진우는 좀처럼 펴지지 않는 내 얼굴을 봤는지 약한 한숨을 내뱉고는 머리를 거칠게 털어댔다.
"난 솔직히 이은상 이해 안 가. 널 두고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래?"
"천성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도 안남았는데. 예전엔 맨날 너 못보면 죽을 거 같이 굴더니."
뭉개지는 속과 다르게 윤진우의 말에 괜히 위로가 돼 웃음부터 나왔다. 이은상은 항상 그랬다. 모두에게 올곧았다. 민희야, 나 정부군 지원하려고. 지구 멸망설로 세상사람이 미쳐가기 시작하고 테러리스트들이 활개할 때쯤 국가에서 정부군 모집 공고가 내려왔다. 그리고 이은상은 바로 지원을 다짐했다. 안돼. 이은상 안돼. 제발 우리 숨어서 살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자. 내뱉고 싶었던 말들은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날 새벽까지 이은상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나를 꽉 안고 놓지 않고 있었다. 이은상이랑은 꽤 오래 사랑했나보다. 서로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아서 내가 막지 못할 걸 알았으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은상이랑 나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이은상을 언제 처음 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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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덥지 않은 대화를 해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내 친구였고 항상 제일 가깝게 지냈던 윤진우. 우리는 끝까지 서로를 위해 울지 않았다. 우리 둘 다 태연했고,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헤어질 때쯤에도.
"잘 살아. 강민희."
"뭘 살아. 얼마나 남았다고."
"혹시 모르잖아. 누구 하나만 살아남을지도."
"너나 잘 살아. 나 간다."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윤진우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걸 차마 볼 수 없어 그대로 등을 돌렸다. 윤진우도 갑자기 사라질 우리들을 생각하니 무서운 거다. 우리 안 죽어. 어쩐지 이은상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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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멸망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쯤, 이은상의 부재가 익숙해져 천천히 이은상의 흔적을 정리했다. 이은상의 옷, 이은상의 세면도구, 이은상과 나의 사진까지. 정리하고 나니 상자 한 박스도 나오지 않았다. 이은상이 이렇게 미니멀하게 살았었나. 이은상의 흔적이 이 작은 상자 안에서 끝난다는 게 어쩐지 좀 서운했다. 그래서 조용히 흐느껴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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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이 지구 멸망을 하루 남긴 채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은상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항상 피칠갑을 하고 들어왔던 때와 달리 이번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처음보는 새하얀 옷을 입고. 민희야, 나 왔어. 하고 여전히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것 까지도. 너무 말도 안되고 이은상다워서 그대로 안겨 펑펑 울었다. 품에 안겨서 울며 이은상을 계속 내리치며 타박했다. 어디 있었는데, 어디 있다가 하루밖에 안 남기고 온건데. 네 짐도 다 정리했단 말이야. 하고 아이처럼 목 놓아서 울었다.
멸망 직전엔 조용히 침대에서 보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불을 끄고 누울 수 있었다. 깜빡이는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채로 이은상의 얼굴을 최대한 눈에 담으며 많은 대화를 했다.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늦었다는 이은상은 내일 당장 우리가 뒤진다는 사실도 망각한 건지 계속 웃는다. 설마 아직까지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 확신하던 지구 멸망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오늘따라 이은상이 의심스럽다. 끝내야 할 일이 도대체 뭔지.
"은상아, 너는 뭐가 좋다고 계속 그렇게 웃어?"
"그럼 뭐가 안 좋은데?"
"너 내일이면 나 못 봐."
"널 어떻게 안 봐 민희야."
이은상 너 진짜 이상해. 당장 내일 우리가 죽잖아. 당장 내일 지구가 없어진다잖아. 너랑 내가 이제 아무 것도 안 남기고 사라진다잖아. 겨우 그친 눈물이 또 다시 흘렀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일줄은. 나 진짜 안 믿을려 했는데... 하루밖에 안남았다니까 너무 무서워.
"무서워 안 해도 돼."
"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우리는 죽지 않으니까."
"너 제발 그런 미친 소리 좀 그만해."
이은상은 나를 달래기 위해 연신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떼기를 반복했다. 내 어깨를 토닥이며 우리는 죽지 않을거야. 라는 말을 반복한다. 사실 이은상도 무서운 게 아닐까. 우리가 사라진다는 게. 그래서 이런 미친소리만 반복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고싶진 않았는데. 한 달만 더 있었더라면. 아니 지구 멸망설이 돌기 직전으로 돌아간다면 정부군에 지원하려는 이은상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텐데. 우리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지 않았을텐데.
"나는 제발 내일이 되면 멀쩡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지금도 수 천 번 생각이 들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웃지 않는 이은상이 느린 눈으로 날 빤히 본다. 나도 그 느린 눈을 오랫동안 맞추고 있었다. 이은상의 눈가가 떨린다.
"왜 그래?"
왜 당연한 걸 그렇게 물어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은상이랑 같이 평범한 아침을 맞고 매일 같이 앉아 식사하고싶어. 쉬는 날엔 하루종일 얽혀 있고싶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은상을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지금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이은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왠지 모를 위화감이 이은상에게서 느껴졌다. 지금 이은상의 표정은..... 너무 기괴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표정. 이은상의 눈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은상이 우는 얼굴을 죽기 하루 전에 처음 봤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이은상의 눈가를 쓸었다. 뭔가 이상하게 흐르는 기분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가 흔들린다. 아무 말 없이 서로 느린 정적을 보내다 이은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젠 나를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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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일 오래된 기억은 가족을 한 번에 잃은 채 병원에서 깨어난 나였다. 그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어 가족에 대한 정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혼자가 외롭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후 큰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맡겨져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큰아버지는 악마같은 인간이었다. 밤마다 큰아버지의 구타를 견디기엔 그 때의 내 몸은 너무 작고 왜소했다. 말끔한 얼굴 밑 사계절 내내 입었던 긴 팔 긴바지 안에는 멍투성이인 내 몸이 존재했다.
나를 데리고 있던 이유가 재산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중학교 때, 큰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사람을 죽였단다. 사람이 죽은 와중에 좆같게도 나는 안 죽고 맞기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큰아버지를 닮아가는 기분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이번에는 작은 이모의 집에 얹혀 살게 됐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날 서로 데려가겠다 악을 썼다. 우리 집이 생각보다 재산이 꽤 됐나보다. 작은 이모네 집은 큰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고 식당의 잡일을 도왔다. 작은 이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닌 줄 알았다. 어린 마음에 한 번 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또 믿어버렸다. 고등학교 때 내 쫓기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때는 최소한의 생활비용으로 학교 근처 지하방에서 살았다. 학교에서는 매일 잤고, 매일 야간 알바를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유일하게 내 사정을 알았던 윤진우는 가끔 자신의 집에 데려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에 나를 끼워 넣었다. 윤진우의 가족은 단란하고 따뜻했다. 기억을 잃고 처음으로 가족 간의 대화는 이렇게 하는구나. 하며 평범한 가족을 눈으로 보며 배워갔다. 그리고 그게 독이될 줄은 몰랐다. 윤진우의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외로움이라는 걸 배우게 됐으니까.
짧은 인생을 살면서 종종 혼잣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외로움을 배운 뒤로는 나는 누군가를 원하기 시작했다. 너랑 나 세상에 단 둘만 남는다면 외롭지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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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을 땐 길던 밤대신 다시 낮이 찾아와 있었지만 이은상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구 이은상의 완벽한 부재로 예상했듯 세상은 지구 멸망전으로 돌아간 듯 평범해졌다. 다시 티비가 틀어지고, 검은 하늘도 더이상 없었고, 창문 밖에선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재잘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구멸망설을 비롯해 이은상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장 이 주전만 해도 내 대신 이은상을 열심히 긁어주던 윤진우까지도. 이은상은 원래 없던 사람마냥 아무도 이은상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은상과 함께 있을동안 내 과거를 완전히 잊고있었다. 내 기억의 처음은 이은상과 함께 있었을 때부터였다. 그래서 그 때의 강민희는 이은상과 행복했었나보다.
버림받은 것 마냥 서럽게 울다 사라진 이은상을 생각했다. 이은상은 도대체 뭐였길래 내 기억 속의 이은상은 여전한건지. 내 망상이었던 건지. 하지만 이은상은 지금 당장이라도 피범벅인 몸을 하고 내 집을 들어올 것처럼 생생했다. 대체 왜 나를 그렇게 사랑했는지. 안 맞는 것 투성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밖에 없었다. 무분별한 테러가 판치는 와중에 이상하리만큼 멀쩡했던 서울과, 몇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상자 하나도 다 채우지 못 했던 이은상의 흔적과 첫 만남이 기억에 없는 것까지도. 그냥 처음부터 이은상을 사랑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있던건데. 너 때문에 지구가 사라지지 않길 빌었던건데. 너는 없고 다시 혼자인 세상만이 남겨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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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우가 나에게 자두사탕을 한 움큼 쥐어준다. 실습 나갔을 때 애기들 주려고 산 건데 너무 많이 남았다. 손바닥에 가득 찬 자두 사탕을 너라도 되는 양 꽉 쥐었다. 해맑게 웃으며 날 닮은 자두를 심겠다던 네가 생각났다. 이은상을 믿지 못했던 날 원망하게 됐다. 우린 정말 안 죽었을텐데. 우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세상에 둘만 남는 거였는데. 네가 날 위해 세상을 없애려 했는데. 이은상을 사랑하면서 믿지 못했다. 내가 이은상을 멋대로 불러들여놓고 이은상을 허무하게 보내버렸다.
이은상은 무슨 존재일까. 왜 아무 것도 아닌 날 위해 세상을 없애려 한 걸까. 그 정도로 나를 사랑했나. 그렇기에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둘러싸면서까지 나를 사랑하러 와주었나. 고작 내 생각 하나로 세상을 뒤집으려던 이은상의 사랑은 초인적인 존재라기엔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너는 나한테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이었구나.
세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빌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은상을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