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드롭
깃발
밥 먹을래?
아닝. 미니 지금 완전 머리 울려. 강민희가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말했다. 머리나 들고 말해. 강민희는 이은상 말에 고분고분 잘 따랐다. 강민희는 오늘 우산도 없는 데다가... 나도 우산이 없어서 안 하던 야자까지 하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난 원래 야자를 해서 석식 신청을 했는데, 강민희는 야자를 안 해 석식도 신청 안 해서 대충 매점 빵으로 배 채우자고 말하는데도 아까부터 벌써 머리가 울린다면서 지랄 지랄. 애초에 돈도 충분히 안 챙겼을 뿐더러 매점에도 우산은 안 팔아서 나와 강민희 둘 다 비가 그칠 때까지 꼬박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막무가내 살아가는 고딩들은 맞지만 이런 꿉꿉한 날에 옷 까지 촉촉이 젖게 만들 팔자는 없을 테니. 그냥 야자만 끝내면 비가 그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가설 하나만 끝까지 믿기로 했다. 안 그치면 어떡해? 멍청한 소리 말라며 언제 다시 머리를 뉘었는지 또 책상에 머리를 올린 강민희와 눈을 맞췄다. 야자가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강민희는 야자가 끝나면 깨워 달라고 한 후에 눈을 붙였다. 밖엔 여전히 비가 창을 금방이라도 깨부술 듯이 내렸다. 머릿속으로 가방 속 내용물을 대강 생각해 본 결과로, 우산을 대처해서 쓸 만한 물건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선택지는 딱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이런 날에라도 우산을 두 개씩 챙기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우산을 빌릴만한 사람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고. 그냥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다니. 약간 좀... 절망 비슷한 것에 빠졌다. 강미니, 우리 매점 가자.
돈도 없으면서 갑자기 매점은 왜 가는 데에. 그러면서 잘도 따라온다. 매점엔 역시 사람이 드글드글 했다. 지갑에 남은 돈 2000원으로 우산 사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1000원짜리 매점 빵으로 배라도 채워야 할 거 같아 일단 무작정 강민희를 매점에 데려왔다. 아오 꿉꿉해. 이은상 너 뭐 먹을 건데? 언제 걸쳐 입었는지 메로나 색 후드를 입은 체였다. 메로나 강민희. 나는 메로나 먹을 거야. 대충 제일 뒤에 줄을 섰다. 진짜 오래 기다리겠다. 쉬는 시간 끝나면 어카냐. 근데 결국 종이 치기 직전에서야 교실에 도착했다. 와, 우리 세이프 졸라 잘 맞춰. 1층인 매점부터 5층인 교실까지 빠꾸 없이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숨이 엄청 찼다. 헉헉거리는 숨을 진정시키고 그제서야 제 자리에 앉았는데도 교실 밖 복도와 계단 부근은 여전히 아직 교실에 못 들어간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다들 꿉꿉함을 느꼈는지 교실엔 에어컨을 틀어 한기가 몸을 감싸돌았다. 아무리 이른 여름이 가시지 않은 9월 이래도 비 오는 날에 트는 에어컨은 추웠다. 동복을 입고 그 위에 후드를 또 겹쳐 입은 강민희도 추운지 자다가도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에어컨을 흘깃흘깃 쳐다봤다. 대충 가방에서 학원 숙제와 답안지를 꺼내 베끼고, 아까 매점에서 메로나와 같이 사 온 커피 우유를 강민희 머리맡에 올렸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작년 첫 시험을 앞둔 날. 학교엔 대소동이 일어났었다.
실은, 그리 명성 높은 대소동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 상강고의 간판이자, 상징인 육상부에서 일어난 일. 학교는 육상부를 학교 상징으로 내 세우면서도, 육상부에 오는 혜택은 전혀 없었다. 육상부 때문에 우리 학교에 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작년 이맘때 육상부엔 나와 강민희가 둘 다 있었다. 나름 1학년 중 루키로 꼽혔는데... 학교에서 전국 대회에 올라 간 한 형의 생기부를 그대로 좆창 내 버려서 지금은 둘 다 육상부 루키도, 육상부도 아니다. 그 형의 생기부가 좆창난 사유는 그 형이 쓰게 된 누명. 지금은 졸업해서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구정모 형 이랬나. 강민희와 친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구정모 형이 쓴 누명은 시험 답안지 유출이었다. 한창 시험 문제를 내기 바쁘던 날, 갑자기 정전이 되더니만 누군가가 교무실에 들어가 답안지를 훔쳐 갔다고 했다. 실질적 범인은 그 형이 아니었는데, 그저 교무실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는 증언 하나 때문에 그 형은 범인으로 몰렸고 생기부는 좆창났으며... 육상부도 퇴출 당했다. 육상부 신경은 좆도 안 쓰면서 우리 학교의 간판 어쩌구... 어쨌든 육상부의 명성을 망친다는 학교의 주장이었다. 구정모 형의 퇴출은 육상부 어느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고. 구정모 형이 육상부에 퇴출 당하자 제일 슬퍼했던 건 아마 구정모 형이 아니라 강민희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선 구정모 형이 동아리를 바꾼 후 강민희가 같은 동아리로 간 이유는 없을 터이니. (사실 제일 슬퍼 한 사람은 나 일 수도 있을 거 같다. 난 여전히 육상부였는데.) 그 형은 학교에서 마지막 학기인 3학년 2학기 말쯤에서야 진범이 나타나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근데 이미 생기부는 좆창 난 마당에 육상부도 퇴출 당한 그 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 형은 누명을 제대로 벗지도 못 한 체 졸업을 했다.
강민희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매년 첫 시험 때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사실 아까 머리 울린다는 게 이것 때문일지도. 자고 있는 강민희와, 며칠 남지 않은 시험. 생각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시간 동안 야자가 끝나 있었다. 창밖을 보니 훤히 내리는 비가 나를 반겼다. 비는 그칠 줄 모르는 듯했고... 우리는 망했다. 일단 야자가 끝나자마자 강민희를 깨우고 가방부터 뒤졌다. 혹시라도 우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까 대충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한 결과와 같아서 절망부터 했다. 그래도 천 원짜리 몇 장은 나올 줄 알았는데. 교실 뒤편 우산꽂이에 잔뜩 있는 우산이 눈에 걸렸는데, 금방 동 나는 걸 보고 그냥 말았다. 강민희는 깨워도 깨워도 제 졸음에 못 이긴 체 벌써 다시 잠들어 머리가 책상이랑 맞닿아 미동도 없이 있었다. 강민희. 야자 끝났어, 이제 집 가야지.
겨우 깨운 강민희와 같이 대충 가방으로 머리만 둘러매고 각자 집에 가기로 했다. 강민희도 대충 가방을 몇 번 뒤지더니 절망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날에만 우산을 안 챙길 수 있지? 엄마 말 들을걸. 또 아침에 우산 챙기라는 부모님의 말을 흘려들었는지 저랬다. 겨우겨우 머리칼만 보송하게 챙기고 학교 정문 앞에 바로 횡단보도로 도착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신호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쫌만 더 빨리 오면 됐을 텐데... 아 몰라... 개빡쳐. 어느새 교복 셔츠 단추도 다 풀어헤친 강민희가 씅 내는 소릴 빗 소리가 그냥 묻어버려 어렴풋이 들렸다. 비가 어찌나 거새게 내리는지 바로 옆에서 그 목청 큰 강민희가 화내는 소리마저도 굵은 빗 소리에 묻혀 티가 안 났다.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들었던 8시 뉴스엔 분명 날씨가 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애꿎은 아침 뉴스를 타박했지만 입 밖으론 내뱉지 않았다. 어차피 빗소리에 섞여 묻힐 말이었기에. 그냥 횡단보도만 건너면 있는 반대편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투명 우산을 사 가는 애들이 부럽기만 했다.
집 근처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서야 살이 아리게 내리던 비도 점점 그쳐갔다. 와... 학교에서 좀만 더 존버할 걸. 괜히 옷만 버렸다며 투정 부렸다. 강민희의 흰 속살이 풀어헤친 교복 셔츠와 다 젖어버려 희다 못해 투명해진 속티 밖으로 내비쳐졌다. 그러게. 좀만 더 남았다가 갈 걸 그랬다. 비가 올 땐 그냥 축축한 느낌에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비가 그치고 나니까 그 축축함에 꿉꿉함도 더해져 기분이 별로였다. 대충 다 젖은 머리를 고개를 내 저어 탈탈 털고 까만 티를 받쳐 입은 교복 셔츠를 벗어냈다. 보송한 부분 하나 없이 다 비로 메꾸어져 있어서 쭉 짜내면 물기가 다 바닥으로 흩뿌려질 듯했다. 일단 비에 젖을까 가방 깊숙이 찔러 넣은 핸드폰부터 찾았다. 헐. 미친. 강민희가 핸드폰을 찾자마자 저 말부터 뱉었다. 정모 형인가? 한동안 연락이 안 됐다고 했던 거 같은데. 강민희는 핸드폰에 눈을 붙였다. 입꼬리 귀에 걸리겠다. 정모 형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메세지 답장을 하느라 말이 없어진 강민희 옆에서 그냥 하릴없이 바닥만 보며 걸었다. 집 근처 모래사장을 걷는데, 수분기 한 줌 없는 모래사장 위를 걸을 때마다 푹푹 패이는 느낌이 비가 온 뒤 다 젖은 신발로 걷기에 썩 좋지만은 못했다. 바닥의 건조한 모래가 이리 튀고 저리 튀고... 결국 바지며 신발이며 다 모래 범벅이 됐다. 기분이 안 좋았다. 여러모로의 이유로.
가만 생각해 보자. 졸업식 때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그때에도 강민희와 나는 친했고, 강민희와 구정모 형도 친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하늘에서 맘껏 뿌려대는 흰 눈을 감당할 우산이 없었으며, 구정모 형은 반대였다. 까만 마스크 쓴 강민희와 흰 롱패딩 입은 이은상이 아니라 까만 마스크 강민희와 흰 마스크 구정모였다는 것이다. 그날 강민희는 우리가 하는 졸업도 아니면서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하다고 세상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정모 형 졸업인데 형이랑 있어야지. 대충 우산을 펴는 정모 형과 그 옆에 우물쭈물 서 있는 강민희에게 웃어 보였다. 잘 가. 응 너두. 그날 하교는 빠꾸 없이 혼자 했다. 빨간 머리 흰색 패딩이 흰 눈 위를 혼자 걷는 모습. 볼 수 없는 나조차도 처량해 미칠 거 같았다. 아, 우산 가져올걸. 졸업식 때만 되면 우산을 챙기는 게 습관 될 거 같았는데, 어차피 앞으로 있을 졸업은 강민희와 함께 할 거라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그날 처량했던 내 모습도 모순적이게도 이젠 아니었다. 더이상 혼자 하교할 일은 없을 터이니. 그러니까, 이제 강민희에게 2순위는 아니라는 말이다.
근데, 지금 보고 있는 이 상황. 강민희를 한 눈 팔게 한 장본인이 구정모 형이 맞다면 나는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된다. 어쩌면 쓸쓸히 눈밭 위를 걷던 빨간 머리 이은상 보다 지금 햇볕이 쨍쨍 쬐어서 아지랑이가 이는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검정 머리 이은상이 더 처량할지도. 핸드폰을 꺼내서 굳이 굳이 옆에 있는 강민희에게 카톡 했다.
- 강미니
- 누구랑 톡 하길래 글케 말이 없어
보낸 메세지 옆 숫자 1 표시가 금방 사그라 든다. 강민희가 그제서야 눈길을 돌렸다. 정모 형. 연락처 바꼈드라... 강민희는 입술을 부리처럼 내밀고 다시 문자 보내기에 집중했다. 아아 글쿠나. 그냥 수긍하고 말았다. 다시 2순위로 밀린 건가? 졸업식 다음 날에도 그랬다. 2순위로 바뀐 나머지 점점 강민희와 격차가 벌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다시금 생긴 정적이 나 혼자만 어색하다. 그 정적을 쫓고 쫓다 지쳐 집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부터 끝냈다. 조금은 보송해진 머리칼이 금방이라도 배신 때리고 물에 젖은 냄새가 날까 싶어서. 교복도 얼른 세탁기 어딘가로 쑤셔 넣었다. 지금 해야 하는 빨래도 많아서 제시간 안에 입을 수 있을지가 걱정됐다. 나도 강민희를 2순위로 밀어내려고 했다.
강민희를 2순위로 생각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냥 비가 온다는 뉴스로 떠들썩한 단톡 아이들 중 강민희를 걱정하는게 아니라 어제 막 널은 빨래를 걱정하면 됐고, 또 우산 안 챙겨 야자 시간 내내 자기만 하다가 집으로 가는 강민희 말고 좀 이따 집에 가서 먹을 저녁 고민이나 하면 될 것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강민희와 내가 다른 점. 강민희는 나처럼 빨래나 저녁 같은 가십거리가 아니라 자신을 아끼던 형이 1순위란 점, 그리고 난 아직도 빨래나 저녁 같은 가십거리마저도 1순위가 아니란 점. 결국 내 1순위는 여전히 강민희란 뜻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과 빨래, 저녁 따위를 같은 위치에 두고 비교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포기하고 우산 두고 왔다며 궁시렁 거릴 강민희 분의 우산도마저 챙겼다. 야자 할 때 또 머리 아프다며 골골거릴 때 줄 두통약까지. 덜 마른 하복 대신 동복 단추를 대충 여미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아침부터 먹구름이 갈피 못 잡고 하늘에 비를 뿌려댔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한기가 도는 교실에, 여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에어컨을 쌩쌩 틀어주는 행정실이 야속했다. 댁들 여름은 9월에도 남아 있는가 보네요. 다들 동복 차림인데 에어컨은 눈치없이 잘만 돌아갔다. 지금 나도 동복, 내 옆에 강민희도 동복. 세상모르고 자는 얼굴이... 예뻤다. 곧게 이어진 속눈썹, 그리고 속눈썹과 연결된 눈꼬리. 시선을 느꼈는지, 일어난 뒤 느러 지게 하품하고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은 체로 한마디 했다. 머 하냐 이은상. 강민희의 한마디에 얼른 정신 차렸다. 아니 걍... 존나 못생겼길래. 마음에도 없는 말 하기는 쉬웠다. 것도 존나게. 긴 여름이 지겨웠다.
그날, 집에 가서 생각했다. 그냥 내가 강민희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건지, 아님 그냥 강민희를 좋아하는 건지. 대충 내가 강민희에게 주절주절 두서없는 고백을 홀린 듯 뱉고... 거기에 강민희가 대답하는 상상을 했다. 나쁘지 않은데? 강민희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뽀뽀하고. 키스... 더 이상 생각 하기를 그만뒀다. 뭣도 모르는 애랑 무슨 상상이야. 머리를 헝클이다 말고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강민희는 키스해 봤을까?
키스. 키스. 키스. 머릿속에 맴돌았다. 강민희는 키스를 해 봤을까? 했으면, 누구랑? 후보는 딱 셋이다. 후보 1번. 중딩때 딱 한 번 사귄 여자친구. 사실 여자친구라 해 봤자 2주 후 물어보니 벌써 깨졌댔다. 오케이 패스. 그럼 다음, 후보 2번. 구정모. 친했으니까... 한 번 실수로라도 입술 맞댄 적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왜, 같이 로맨스 영화를 본다던가... 잠깐 강민희와 구정모 형이 입술 부비는 장면을 흔한 로맨스 영화 속 장면처럼 상상 해 버렸다. 아악. 항마력 딸려. 근데 진짜 항마력 딸리는 후보는 하나 더 있었으니. 후보 3번, 이은상. 사실, 며칠 전 강민희와 키스하는 꿈을 꿨다. 야자 때 그날따라 잠이 쏟아지길래, 그냥 대충 책상에 머리를 뉘었는데 그대로 잠 들어서 꿈까지 꿀 정도로 푹 잤다. 근데 강민희와 키스하는 꿈이라 찝찝한데 그래도 좋았다. ...아니 사실 찝찝하지도 않았다. 꿈이라서 그런가? 한창 상상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릴때, 강민희가 말을 걸었다. 이은상, 오늘 야자 빠꾸 콜?
학교 담을 넘으면서도 강민희는 키스를 해 봤을까 안 해 봤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 저장 공간이 넘쳐 흘렀다. 무슨 걸으면서도 기억들이 뚝뚝 흐르는 기분. 곧 있음 헨젤과 그레텔 캐스팅 당할 거 같았다. 어느샌가 잡힌 강민희 손에 이끌려서 강민희네 집 앞까지 도착했다. 어디 가잔 말은 없었는데, 항상 둘이서만 야자를 쨀 때면 강민희 손에 이끌려서 가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별로 연연하진 않았다. 근데 사실... 존나 의식한 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둘만 남은 새에 집에 데리고 오다니용. 괜히 심호흡한 후 강민희네 집에 발을 들였다. 와 진짜 오랜만. 그동안 제 집으로 부르지 않던 강민희 탓에 강민희네 집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마냥 제 집인 양 가방부터 벗어던지고 주방에 언뜻 보이는 사탕 하날 집어먹었다. 체리 드롭? 처음 보는 이름인데. 체리 맛이 입안 가득 굴려졌다.
자연스럽게 티비를 켜 넷플릭스 창으로 들어섰다. 야, 오늘은 뭐 볼까. 결국 선택은 저번에 다 못 본 건축학개론이었다. 나 쫌 깐지나는 흑백영화 보고 싶었는데. 영어도 못 하면서 염병 떤다며 욕먹어서 입 다물고 건축학개론을 보기로 했다. 남아있던 GS 편의점 표 영화관 팝콘과 보다 말았던 건축학개론. 사실 영화는 제 취향과 맞지 않아 재미는 없었는데 팝콘 줏어 먹으면서 영화에 집중하는 강민희 얼굴이 예뻐서 그걸 보느라 영화는 다 끝나 있었다. 이은상 머 잘못 먹었냐. 존나 얼빠져있어. 강민희가 쿡쿡 쪼개면서 말 걸길래 아니라고 부정하고 말았다. 체리 드롭 하나를 더 꺼내 와서 입에 물었다.
강민희 너 키스해 봤어?
한창 입안을 휘젔던 체리 드롭처럼 입안에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 나도 헙. 당황했다가도 애써 당황한 티를 안 내려 했다. 저번 후보를 나열했다가도 다 부정 했던게 무심하게도, 강민희는 말티즈 같던 눈이 땡그래지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아니..., 뭐 못 해볼 건 없지. 해 봤단 뜻인가? 누구랑 했는지 물으려다 괜히 손 데일까 말았다. 그래도 궁금하긴 미치도록 궁금했다. 누구랑 한 거지. 여러 후보를 나열했던 게 생각났다. 근데 이내 그 생각은 접어도 됐다. 강민희가 마치 제 생각을 읽었다는 양 파하학 웃으면서 눈을 맞췄다. 아마 무의식중에서도 미간이 찌푸려져 그런 거 같았다. 이은상..., 그럼 넌 해 봤어? 예상치 못 한 역질문에 되려 다시 당황했다. 음... 아니. 눈을 허공에 돌리다 맞추니 무드 없이 강민희가 입술을 맞대 온다. 후보 3번 당선을 축하합니다. 첫 키스의 맛은 체리 드롭. 그러니까, 체리 맛이었다.